“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믿음” 장 기려 부산모임 72년 4월호
1.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은 1900여년전에 한번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물론 생물학적 (육적) 생명의 죽으심이었다. 그 증거는 군병들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두 강도는 죽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리를 꺽고 예수에게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꺽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요19:33-35). 그 옆에 서서 지켜보던 백부장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운명하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다(막 15:39). 이 예수님의 죽음은 육적인 죽음이기는 하지마는 인류의 죽음을 대표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보아 속죄, 곧 대속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3일 후에 부활하셨다. 부활의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너무도 확실하다. 부활일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에게(마23:1 막16: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눅24:13-15, 마28:12-13) 그날 저녁 도마가 없는 열제자에게(눅24:36-42, 요20:19-23), 그 다음 주일 도마가 열제자와 같이 있을 때(요20:26-29), 그 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이 고기를 잡을 때(요21:1-), 또 승천하실 때에는 500여 신도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승천하셨다(마28:16-17). 그 후에 야고보와 사울에게 나타나 보이셨는데, 사울에게는 사울이 예수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옵고 회심하여 바울로 변화시켜 주셨다(고전15장). 첫번 순교자 스데반도 돌매에 맞아 운명하게 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 우러러 보았다(행7:56). 그 밖에도 순교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고 자신이 그 부활체내에서 사는 것을 체험하면서 승리생활을 했다. 1945년 4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반대투쟁을 하므로 6년간을 감옥에서 고난받다가 77세의 노령으로서 기진맥진하여 병보석으로 출감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셨던 최권능 목사는 내가 그 곁에 가서 서 있을 때 말하기를 “70여년 나를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며 내 기도를 들어주시던 그 주님을 지금 나더러 모른다고 말하라고 해” 하면서 그 옳지 못함을 여러 번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진정 크리스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2. 부활의 원리
만일 부활의 원리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의 원리는 현실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보는 일이 아닌가? 밀 한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그것이 죽어 분해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시편 기자도 이 원리를 깨닫고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심이니이다.”고 예언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원리, 예언의 성취이다. 원래 육체는 생명의 기관이다. 육체는 영의 활동을 위해서는 불완전한 기관이다. 즉 육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기관으로서 자유자재하는 영의 활동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영화(榮化)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현실에 있어서도 예수님 품에서 영적생활을 하다가 자유로 육체를 벗어 버리고 하늘나라(하나님 품)로 가는 사람을 보았다.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을 죽음이라하고 예수님(하나님) 품에 안기어 하늘나라의 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몸을 입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과거에 아프리카 전도생활을 하며 홀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톤의 삶과 죽음이라든지 1947년 평양에서 세상을 떠난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님 부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오정모 집사는 유방암 수술 후 2년만에 폐에 전위된 증상이 나타나서 10개월 병상에 있었는데 그동안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항상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나의 소감은 그가 주님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와 교회가 세속화 되지 않고 동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느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에는 대단히 기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주위에서 시중하는 사람들을 다 각각 제 집으로 보내고 홀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 시체를 보는 자는 그 육체가 옷과 같이 느껴졌다. 그의 죽음은 바로 육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그의 생명은 주님의 품에 영원히 안긴 것을 믿게하여 주었다. 죽음이 진리를 반역한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미친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이루어지는 원리도 스스로 분명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바울의 설명이 확실히 해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확증을 주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이 양심이 있어서 보존되며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원리에 순종하려고 하고 있다.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생명의 요구를 보라. 슈바이처와 같이 생명에 대한 외경을 느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부활의 원리를 확인하게 되고 또 부활하신 그리스도(성령)로 말미암아 육체에 있으면서도 영적생명(영생)의 진실을 살게 될 것이다.
3.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셨나
무덤이 빈 것은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육체 그대로 부활 하셨는가? 아니다. 육체는 혈기의 몸이다. 혈기의 몸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부족하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다. 자유자재의 몸이다. 문이 닫혔을 때 그 모임 중에 문득 나타나셨다가 말씀을 마치고는 곧 보이지 않게 되는 몸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쳐 주실 때 저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고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네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자국과 내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믿으라 하셨고 또 영이라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가져오라하여 같이 잡수시기도 하신 영의 몸이다. 즉 육의 욕구에 맞는 몸이 아니고 영의 생명의 활동에 맞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다. 성령은 바로 그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갔다가 다시 와서 너희들을 영접하겠다 하셨고 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너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러한 인격자로 부활하셨다. 진정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성령의 역사이다.
4. 부활의 주님의 축복과 분부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찾아 오실 때 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면서 여러 번 축복해 주셨다. 우리의 평강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체험한다. 믿음 생활에서 얻는 매일의 축복이요 은혜이다. 감사는 여기로부터 우러나온다. 베드로에게 분부하신 것은 “내 양을 먹이라”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내 양을 먹이라” 하시고 세번이나 되풀이하여 간절히 부탁하셨다(요21:15-17). 베드로와 온 인류를 이같이 사랑하셨다. 생명은 사람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분부하셨다(마 28:19-20). 이 분부대로 이 복음은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 몇세기 동안의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생명은 사람의 양심을 살게하고 있다.
5. 나의 부활신앙 체험.
나의 믿음은 성경의 말씀과 그 해석자들에게서 듣고 보고 또 스스로 체험을 통하여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믿게 되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나 자신에 있어서 신기한 은혜라고 생각하다. 흔히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고 의심하는 모양인데, 나는 어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민의 구주 그리스도 이심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어지니 순전한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언제인가 한때(1941년 3-12월)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당하여 소위 사면초가라고 하는 상태에 이른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 만을 상대로 하고 지냈다. 그 뒤로는 나는 내세에 대하여 의심하려고 해도 의심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데 영원하신 그의 성격을 체험한 까닭이라고 본다. 마치 노아 홍수때 그 홍수가 지나간 뒤에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보았더니 육지가 들어난 증거로 감람나무 잎 하나를 물고 들어온 것과 같은 확증을 얻은 것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비겁하고 명예를 탐하는 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밖에 알려고 하지 않는 자로 된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체험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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