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이상주의 장기려 1969년 부산모임 11호
인간적 이상주의란 인간의 지식과 덕성을 발전시키어 이상에 도달하겠다는 것인데, 이 논리는 이상의 실재와 실현성이 극히 박약하며, 결국 이상은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기독교 이상주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심과 또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하늘나라를 이루어 주심을 믿는 삶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믿고 승리생활을 하였다.
1. 믿음과 이상
야나이하라 선생은 이상과 믿음에 관한 정의를 다음의 세가지로 말하였다.
사람이 장래에 대하여 가지는 소망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는 벌써 실현되어 있다. 즉 인류의 영화, 사회의 완성, 개인의 구원,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어 실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소망으로 비친 것이다.
우리는 현상계에 있어서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한다고 하나, 그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현실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실재하는 그 뜻을 뚫어보고 이해하는데 있다. 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감각기로서는 알 수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 인간 및 우주의 본질이 감각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 자각이 벌써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 가를 알고자 할 뿐 아니라, 왜 존재하는가를 이해하여 그 참된 뜻을 표현하려고 소망한다. 즉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가 되는 사죄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를 이룬다고 하는 사실성 (이상)은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으리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취되어 현실로 실재하는 까닭에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것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또는 감정적으로 환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까닭에 사람의 자각에 비친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2. 이상과 현실
우리는 현실을 존중한다. 왜냐하면 예민한 현실의 감각이 ………(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그리고 맹종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의하여 현실을 보는 사람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현실 중에서 진실을 보는 힘은 학문이다. 학문은 현실 중에서 법칙적인 것을 식별하고, 그 참된 뜻과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 학문의 권위가 있다. 따라서 학문은 정치, 실업, 경제 기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당면의 실제적인 정책에 대하여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게 된다. 학문은 현실정책을 비판하고 지도함으로써 그 현실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법칙적으로 파악하고도 이것을 발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학문의 지도적 임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는 권력과 이익에 꼬리를 흔들며 영합하는 방관적 학자, 또는 시국을 이용하여 동료학자에 대한 사원을 품는 것과 같은 식모적인 학자, 또는 탐욕적인 정책에 대하여 근심하고 개탄하는 학자는 있어도, 정책을 비판하고 바르게 지도하는 학자는 드물다.
3. 세계관과 신앙
사람은 우주 창조를 보지 못했다. 우주의 창조는 사람보다 먼저 있었고, 하나님은 우주 창조보다 앞서 계신다.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바이다. 우주의 삼라 만상은 무엇에 기초하여 있는가? 하나님의 실재가 사물 존재의 기초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 계시려고 하여 계시는 이시다. 즉 실재의 근원이시며 실재 자체이시다. 이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하여 비로서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 우주와 자연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뜻에 터 닦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어서 그 목적은 사람에게 생활의 환경을 주는데 있다. 자연에는 인격이나 의사가 없는 것이지마는 바울은 마치 자연에 영이 있는 것처럼 의인화 (擬人化)하여 말하기를 ‘지금까지 만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과 자연환경과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구원 없이 자연의 영화도 없고 자연의 영화 없이는 하늘나라의 완성도 없다. 사람이 이 이상을 아는 것은 믿음에 의한다.
4. 인생관과 신앙
만일 누가 나에게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독교 이상주의로 살고 싶다고 대답하리라.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고 사회는 진실과 사랑이 없으며 인생은 무엇을 목적하고 사는지? 혼돈상태와 같이 보인다.
현대의 지식과 교양이 풍부한 사람들은 인간적 이상주의를 고조하며, 대다수의 서적은 인간적 이상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이상주의를 강조하면서 사는 이는 적다. 인간적 이상주의란 인간의 지식과 덕성을 발전시키어 이상에 도달하겠다는 것인데, 이 논리는 이상의 실재와 실현성이 극히 박약하며, 결국 이상은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기독교 이상주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심과 또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하늘나라를 이루어 주심을 믿는 삶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믿고 승리생활을 하였다.
1. 믿음과 이상
야나이하라 선생은 이상과 믿음에 관한 정의를 다음의 세가지로 말하였다.
1) 이상이란 하나님에게 있어서 벌써 실현된 뜻이나 땅에서는 그 실현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벌써 성립된 경륜이며 땅에서는 그 성취가 진행중의 것이다.
2) 이상은 사물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상 저편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과 유리된 허공적 환상이 아니고 도리어 현상의 기초가 되어 있고 현상 가운데 상징화된 본질이다.
3) 이상은 역사의 장래이다. 따라서 현재 저편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와 관계없는 공상이 아니고 차라리 현재의 밑을 흐르고 있고, 현재를 역사의 종국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위에 정의한 이상을 인식하고 파악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곧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역사의 종국을 현재로 하고, 사물의 본질을 현실로 하며, 하늘나라와 그 국민 (하나님 자녀)으로의 삶을 지향하여 살게하는 능력이다.사람이 장래에 대하여 가지는 소망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는 벌써 실현되어 있다. 즉 인류의 영화, 사회의 완성, 개인의 구원,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어 실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소망으로 비친 것이다.
우리는 현상계에 있어서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한다고 하나, 그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현실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실재하는 그 뜻을 뚫어보고 이해하는데 있다. 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감각기로서는 알 수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 인간 및 우주의 본질이 감각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 자각이 벌써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 가를 알고자 할 뿐 아니라, 왜 존재하는가를 이해하여 그 참된 뜻을 표현하려고 소망한다. 즉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가 되는 사죄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를 이룬다고 하는 사실성 (이상)은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으리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취되어 현실로 실재하는 까닭에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것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또는 감정적으로 환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까닭에 사람의 자각에 비친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2. 이상과 현실
우리는 현실을 존중한다. 왜냐하면 예민한 현실의 감각이 ………(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그리고 맹종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의하여 현실을 보는 사람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현실 중에서 진실을 보는 힘은 학문이다. 학문은 현실 중에서 법칙적인 것을 식별하고, 그 참된 뜻과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 학문의 권위가 있다. 따라서 학문은 정치, 실업, 경제 기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당면의 실제적인 정책에 대하여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게 된다. 학문은 현실정책을 비판하고 지도함으로써 그 현실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법칙적으로 파악하고도 이것을 발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학문의 지도적 임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는 권력과 이익에 꼬리를 흔들며 영합하는 방관적 학자, 또는 시국을 이용하여 동료학자에 대한 사원을 품는 것과 같은 식모적인 학자, 또는 탐욕적인 정책에 대하여 근심하고 개탄하는 학자는 있어도, 정책을 비판하고 바르게 지도하는 학자는 드물다.
현실의 법칙적 파악은 학문이지마는 법칙의 인격적 파악이 아니라면 신 ……. (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하는 것이다. 이 법칙의 인격적 파악은 믿음의 힘이다. 현실에 대하여 학문의 권위가 있는 것처럼 학문에 대하여 신앙의 권위가 있다. 신앙의 권위는 인격의 권위이며 의사(意思)의 권위이다. 또한 실행의 권위인 것이다. 옛날부터 예언자는 현실에서 사건을 이상에 비치어 사물의 진상을 궁구하고 시국의 동향을 잘 살펴서 경고의 소래를 발한다. 저들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세상은 저들을 버리고 죽였다. 그러나 역사가 지나 간 뒤에 진실을 살펴보는 때가 오면 신앙에 의하여 산 사람은 영예를 얻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사람은 믿음으로 확증되었나니라”라고 하였다 (히 11;2).
사람은 우주 창조를 보지 못했다. 우주의 창조는 사람보다 먼저 있었고, 하나님은 우주 창조보다 앞서 계신다.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바이다. 우주의 삼라 만상은 무엇에 기초하여 있는가? 하나님의 실재가 사물 존재의 기초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 계시려고 하여 계시는 이시다. 즉 실재의 근원이시며 실재 자체이시다. 이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하여 비로서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 우주와 자연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뜻에 터 닦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어서 그 목적은 사람에게 생활의 환경을 주는데 있다. 자연에는 인격이나 의사가 없는 것이지마는 바울은 마치 자연에 영이 있는 것처럼 의인화 (擬人化)하여 말하기를 ‘지금까지 만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과 자연환경과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구원 없이 자연의 영화도 없고 자연의 영화 없이는 하늘나라의 완성도 없다. 사람이 이 이상을 아는 것은 믿음에 의한다.
4. 인생관과 신앙
이상 세계인 하늘나라의 주체는 하나님과 ….서(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자연은 환경이며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인격적 존재자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상징(象徵)으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히 되는 일이 인간 개인의 이상이며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늘나라를 실현하는 일이 인간사회의 이상이다. 이러한 인생의 의의와 목적을 깨닫는 능력은 신앙이다. 또한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생활 태도를 취하게 하는 힘도 신앙이다. 옛 사람들 중에서 맨 처음에 아벨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 형 가인보다 나은 드렸던 것이다. 그의 생활 태도가 현실에서 이상을 향한 것이 아니고 이상에서 현실을 보고 산 까닭이다. 그의 인생관이 자기의 뜻대로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산 까닭이다. 아벨이 드린 희생은 왜 의롭다고 하여 영원한 예물이 되었던가? 믿음으로 드린 까닭이다. 그가 드린 것은 현실을 쌓아 올려 이상에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인 까닭이다. 즉 율법의 의가 아니고 믿음의 의인 까닭이다. 그는 믿음에 의하여 일생을 드린 까닭이다. 그는 죽었으나, 오히려 지금도 말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의하여 현실을 격려하고 있다. 그의 영의 힘은 지금도 현실로 나타나, 이상으로 산 생명의 영원적 현재를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부활의 이상에 기초하여 살며, 또한 부활의 완성을 예표하는 사실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일정시대에 있어서 주기철 목사와 공산군이 왔을 때에 있어서 손양원 목사와 같은 이들은 [옛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바라는 것을 확신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진실로 하는] 믿음에 의하여 증거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믿음의 제물로써 하나님에게 드렸다. 이들은 현실에 의하여 이상을 삭감하려는 타협적 태도를 버리고, 이상에서 현실을 내려다보고 현실을 비판하고 규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들이 [진실한 믿음]을 강조한 것은 곧 이상에서 사는 그들의 생활태도이었다. 이들이 믿음으로 이상에서 산 까닭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지금에 현실, 현실이라고 물거품처럼 터트리다가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구멍으로 기어들가는 게와 같은 인간들이 횡행하는 중에 있어서, 우리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하늘 높은 이상의 소리이다. 영원히 살아 말하는 지도정신이다. 이상과 신앙, 지도정신의 결핍, 이것이 현대 우리나라와 세계의 근본적인 결함이 아닌가. 온 세계인류는 이러한 이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믿음의 삶은 곧 하나님 자녀로서 하늘나라를 이루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일정시대에 있어서 주기철 목사와 공산군이 왔을 때에 있어서 손양원 목사와 같은 이들은 [옛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바라는 것을 확신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진실로 하는] 믿음에 의하여 증거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믿음의 제물로써 하나님에게 드렸다. 이들은 현실에 의하여 이상을 삭감하려는 타협적 태도를 버리고, 이상에서 현실을 내려다보고 현실을 비판하고 규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들이 [진실한 믿음]을 강조한 것은 곧 이상에서 사는 그들의 생활태도이었다. 이들이 믿음으로 이상에서 산 까닭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지금에 현실, 현실이라고 물거품처럼 터트리다가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구멍으로 기어들가는 게와 같은 인간들이 횡행하는 중에 있어서, 우리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하늘 높은 이상의 소리이다. 영원히 살아 말하는 지도정신이다. 이상과 신앙, 지도정신의 결핍, 이것이 현대 우리나라와 세계의 근본적인 결함이 아닌가. 온 세계인류는 이러한 이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믿음의 삶은 곧 하나님 자녀로서 하늘나라를 이루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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