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믿음” 장 기려 부산모임 72년 4월호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믿음  장 기려  부산모임 72년 4월호
1.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은 1900여년전에 한번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물론 생물학적 (육적) 생명의 죽으심이었다. 그 증거는 군병들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두 강도는 죽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리를 꺽고 예수에게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꺽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요19:33-35). 그 옆에 서서 지켜보던 백부장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운명하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다(막 15:39). 이 예수님의 죽음은 육적인 죽음이기는 하지마는 인류의 죽음을 대표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보아 속죄, 곧 대속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3일 후에 부활하셨다. 부활의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너무도 확실하다. 부활일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에게(마23:1 막16: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24:13-15, 마28:12-13) 그날 저녁 도마가 없는 열제자에게(24:36-42, 요20:19-23), 그 다음 주일 도마가 열제자와 같이 있을 때(요20:26-29), 그 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이 고기를 잡을 때(요21:1-), 또 승천하실 때에는 500여 신도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승천하셨다(마28:16-17). 그 후에 야고보와 사울에게 나타나 보이셨는데, 사울에게는 사울이 예수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옵고 회심하여 바울로 변화시켜 주셨다(고전15장). 첫번 순교자 스데반도 돌매에 맞아 운명하게 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 우러러 보았다(행7:56). 그 밖에도 순교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고 자신이 그 부활체내에서 사는 것을 체험하면서 승리생활을 했다. 1945년 4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반대투쟁을 하므로 6년간을 감옥에서 고난받다가 77세의 노령으로서 기진맥진하여 병보석으로 출감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셨던 최권능 목사는 내가 그 곁에 가서 서 있을 때 말하기를 70여년 나를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며 내 기도를 들어주시던 그 주님을 지금 나더러 모른다고 말하라고 해 하면서 그 옳지 못함을 여러 번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진정 크리스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2. 부활의 원리                                                                      
만일 부활의 원리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의 원리는 현실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보는 일이 아닌가? 밀 한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그것이 죽어 분해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시편 기자도 이 원리를 깨닫고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심이니이다.고 예언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원리, 예언의 성취이다. 원래 육체는 생명의 기관이다. 육체는 영의 활동을 위해서는 불완전한 기관이다. 즉 육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기관으로서 자유자재하는 영의 활동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영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현실에 있어서도 예수님 품에서 영적생활을 하다가 자유로 육체를 벗어 버리고 하늘나라(하나님 품)로 가는 사람을 보았다.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을 죽음이라하고 예수님(하나님) 품에 안기어 하늘나라의 생활을 자유로 할 수 있는 몸을 입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과거에 아프리카 전도생활을 하며 홀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톤의 삶과 죽음이라든지 1947년 평양에서 세상을 떠난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님 부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오정모 집사는 유방암 수술 후 2년만에 폐에 전위된 증상이 나타나서 10개월 병상에 있었는데 그동안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항상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나의 소감은 그가 주님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와 교회가 세속화 되지 않고 동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느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에는 대단히 기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주위에서 시중하는 사람들을 다 각각 제 집으로 보내고 홀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 시체를 보는 자는 그 육체가 옷과 같이 느껴졌다. 그의 죽음은 바로 육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그의 생명은 주님의 품에 영원히 안긴 것을 믿게하여 주었다. 죽음이 진리를 반역한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미친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이루어지는 원리도 스스로 분명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바울의 설명이 확실히 해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확증을 주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이 양심이 있어서 보존되며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원리에 순종하려고 하고 있다.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생명의 요구를 보라. 슈바이처와 같이 생명에 대한 외경을 느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부활의 원리를 확인하게 되고 또 활하신 그리스도(성령)로 말미암아 육체에 있으면서도 영적생명(영생)의 진실을 살게 될 것이다.
3.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셨나

 
무덤이 빈 것은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육체 그대로 부활 하셨가? 아니다. 육체는 혈기의 몸이다. 혈기의 몸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부족하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다. 자유자재의 몸이다. 문이 닫혔을 때 그 모임 중에 문득 나타나셨다가 말씀을 마치고는 곧 보이지 않게 되는 몸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쳐 주실 때 저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고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네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자국과 내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믿으라 하셨고 또 영이라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가져오라하여 같이 잡수시기도 하신 영의 몸이다. 즉 육의 욕구에 맞는 몸이 아니고 영의 생명의 활동에 맞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다. 성령은 바로 그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갔다가 다시 와서 너희들을 영접하겠다 하셨고 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너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러한 인격자로 부활하셨다. 진정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성령의 역사이다.
4. 부활의 주님의 축복과 분부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찾아 오실 때 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면서 여러 번 축복해 주셨다. 우리의 평강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체험한다. 믿음 생활에서 얻는 매일의 축복이요 은혜이다. 감사는 여기로부터 우러나온다. 베드로에게 분부하신 것은 내 양을 먹이라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내 양을 먹이라 하시고 세번이나 되풀이하여 간절히 부탁하셨다(요21:15-17). 베드로와 온 인류를 이같이 사랑하셨다. 생명은 사람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분부하셨다(마 28:19-20). 이 분부대로 이 복음은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 몇세기 동안의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생명은 사람의 양심을 살게하고 있다.
5. 나의 부활신앙 체험.
나의 믿음은 성경의 말씀과 그 해석자들에게서 듣고 보고 또 스스로 체험을 통하여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믿게 되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나 자신에 있어서 신기한 은혜라고 생각하다. 흔히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고 의심하는 모양인데, 나는 어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민의 구주 그리스도 이심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어지니 순전한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언제인가 한때(1941년 3-12월)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당하여 소위 사면초가라고 하는 상태에 이른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 만을 상대로 하고 지냈다. 그 뒤로는 나는 내세에 대하여 의심하려고 해도 의심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데 영원하신 그의 성격을 체험한 까닭이라고 본다. 마치 노아 홍수때 그 홍수가 지나간 뒤에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보았더니 육지가 들어난 증거로 감나무 잎 하나를 물고 들어온 것과 같은 확증을 얻은 것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비겁하고 명예를 탐하는 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밖에 알려고 하지 않는 자로 된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체험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이다.

"역사를 담당하는 사람 " 장기려 1972년 8월 부산모임

역사를 담당하는 사람       장기려   1972년 8월 부산모임
히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일은 우리가 진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진리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위대한 훌륭한 선생을 떠나 보낸 뒤에 남은 제자들에게 불안감과 무력감이 감도는 것은 그 선생의 위대한 영향력에만 도취하고 그 선생을 지도했던 진리에 눈 뜨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영웅주의로서 선생을 쫓지 말라. 영웅은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그리고 그 증언을 하는 이름없는 전사가 있으면 된다. 그리스도는 행복되도다 너희 힘있는 위인이여라고 하시지 않고, 행복되도다 너희 가난한 자여 라고 말씀하신다. 지가의 무력을 느끼고 머리를 수그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행복되다고 하신다. 이것이 참 진리이다. 이 진리가운데 약한 우리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신뢰하기만 하면 후에는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신다. 이 신뢰가 (믿음이) 비로서 큰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힘의 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다음 시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들은 다소나마 나의 힘으로 그것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참으로 역사를 올바르게 지도하고 새 시대를 건설하 힘을 가지고 계신이는 하나님뿐이어서, 이 하나님에게 각 사람이 각각 그 직장에서 믿고 따르는 것이 중대한 과제이다. 이와 같이 작은 사람들의 힘을 하나님은 하나로 만들어 큰 힘으로 해 주신다. 다음시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할 유일 최대의 사은 이 하나님의 충실한 한 병졸이 되는데 있다. 만일 이것을 산산이 헤져진 무통제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은 하나님의 지배와 경륜을 참으로 믿지 않는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나의 마음에 큰 평안을 준다. 또 내가 무인가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주제넘은 각을 깨 서준다. 그리고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견디고 남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을 사랑해 가는 낮은 마음을 주신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고 하면 우리의 생각을 넘치는 새로운 움이 거기에서 돋아 나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이 겸손한 의뢰심을 잊은 역사의식이 다시 일본의 장래를 파기하게 되리라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벌써 그 징조는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자기의 주도권으로 역사를 형성하려고 하는 때에 파괴로 떨어져 들갈 함정이 언제나 열려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진리를 반역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지배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이데, 우리 시조는 이 시험에 졌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면 마음에서 진실을 원하고 또 그렇게 꾸미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억압하고 파화는 길을 준비하게 되는 사태가 나타나게 된다. 인류 역사는 바로 이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현재에도 같은 일이 어디서나 진행되고 있다. 그 진상을 통찰하고 이것에 대처하는 일이 우리들의 과제이다. 끝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은 요한복음 21:18-19 말씀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우리들의 생에는 베드로와 같이 원치 않는 대로 인도되어도 믿고 따르는 일 이것이 역사를 담당한 자로서 합당한 일인 것을 확신하고 강조하는 바이다. 

"기도하자" 장기려 부산모임 73년 2월호

기도하자  장 기려  부산모임 73년 2월호
성경이 영혼의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양식은 3-4주간 먹지 못하고 사는 일이 있으나 호흡은 몇 시간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만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가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과의 교통으로 살 때에 사람답게 곧 하나님의 아들답게 산다. 이와 같이 기도의 생활로 일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신 이는 우리 주님이시다. 그는 설교하실 때, 병을 낫게 하실 때, 틈 나실 때, 십자가를 지실 때 까지 항상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기도를 간절히 하라고 권하셨다 ( 18:1-8). 또 비유로 가르치시기를 자기을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고 세리와 같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자기를 낮추는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하셨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또 환난이 제자들에게 임할 것을 내다 보시고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셨다 ( 21:36). 바울 선생도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골4:2),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라고 자기의 체험을 통하여 간절히 권했다.
나는 오늘 여기에서는 야고보서 5:13-18에 있는 말씀을 생각하고저 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르므로 저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함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열매를 내었느니라.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나의 체험을 통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을 써서 비판을 받고저 한다. 위의 말씀을 네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곧
1) 고난 당하는 자의 기도, 2) 병든 자를 위한 기도, 3) 믿음의 기도, 4) 의인의 기도
그러나 1)과 2,  3) 과 4)는 서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 고난 당하는 자의 기도
은 존속을 위한 고난을 당한다. 소위 인생고를 면할 수 없다. 사람이 육과 마음 (정신) 또는 혼으로 되어 있으므로 육의 고난과 마음(정신)으로 나눌 수 있지마는 이 둘은 통일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육의 고난은 주로 의, 식, 주에 대한 위협을 비롯해서 이것을 얻기 위한 조건의 결핍, 예를 들면 신체건강의 상실, 사회 활동의 터전 또는 직업이 없어서 받는 것들일 것이다. 다음에 정신적 고통에는 육적 고난으로 일어나는 2차적인 것 이외에 일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주로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 답게 살려고 하는 의욕은 있으나,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여 번민하는 것으로부터 또 사회적으로 불의의 세력에 억압되어 자유를 얻지 못하여 오는 고난 또는 가정과 사회의 불화에서 오는 고난들 등, 낱낱이 들 수 없으리만치 많다.
그런데, 여기에 고난 당하는 자는 복음을 인하여 고난 당하는 자를 말한다. 진리 증거에 반대가 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환난을 겸하여 받게 된다. 고난중에서도 원인이 분명한 것은 단념이라도 하렸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즉 성경에 나타난 욥의 고난이다. 욥은 하루 아침에 온 소유와 딸 일곱, 아들 셋을 다 잃었다.  자기의 몸에는 전신에 헌데가 나서 견디기 어려웠고 오직 하나의 반신인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내 뱉지를 않나, 친한 친구 세사람은 와서 하나님의 인과의 보응을 들어 반드시 너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을 것인즉 회개하라고 냉혹한 비판을 계속하는 고난을 당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 뜻을 몰라 더 괴로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욥에 대해서 칭찬하신 것이 동기가 되어 마귀가 하나님에게 참소하므로 욥을 믿는 나머지 사단의 고난에 일시 내어 맡겼다. 고난은 사단이 사람에게 입게한다.
나도 나의 과오와 무지로 복음병원에서 형제들이 불화의 상태에 이른 것을 경험했다. 형제가 마음이 상하여 풀지 못할 때에 윗사람으로서 고난은 적지 않은 것을 느꼈다. 가정에서 부모의 고난은 형제 불화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때의 해결의 방법은 이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은 무익함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아, 와서 기도하라고 하나님은 부르신다. 고난은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하면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고난의 책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깨닫게 된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나의 아버지, 또한 우리 아버지, 나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뜻, 인류의 것임을 깨닫고 달게 받고 승리하게 된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반대로 기도가 들려졌을 때,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을 때, 전쟁이 그치고 화해가 성립되었을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런 때의 기도는 찬송으로 나타난다. 시와 찬미로 화답할 것이다. 나는 나의 민족의 고난을 붙잡고 내가 기도할 때에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고 내가 하나님 인 것을 알게 될 때에  해결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아멘 하였다.
2. 병든 자를 위한 기도
사람은 다 병자이다. 한번은 병들어 죽는다. 육은 죽어도 영혼은 영생한다. 육의 병의 대다수는 자기 몸에서 저항하는 힘이 생겨서 병변을 제거하고 회복하는 기전으로 자연히 낫는다. 이것은 과학자들은 자연법칙에 의한다고 하지마는 이 자연법칙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법칙으로 낫는다 고 말 할 수 있다. 의사들은 그 자연법칙을 잘 알아 순종함으로써 건강을 회복케 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지혜와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병중에는 특효약이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어서 지금까지 낫지 못하던 병들이 낫게 되는 일이 있으나 이것도 또한 몸에서 낫는 힘과 기전이 이루어져서 낫는 것이다. 어떤 유명한 의사도 100% 진단을 바로 하거나 어떤 특효약도 100% 낫게 하는 것은 없다. 결국 몸에서 나을 수 있도록 되어서 낫는 것이어서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이든지 설명되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이 글을 쓸때에는 의사가 많지 않았고, 또 교회의 사명은 병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능력, 즉 믿음을 얻게 하는 데 있었으며 또 그것으로 병이 낫게 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제 나는 나의 경험을 들어 증거하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년전의 일이다. 나의 둘째 딸 성용이는 출생후부터 몸이 약하고 체중이 정상보다 적고 때때로 기침과 설사를 자주하여 병이 많았다. 그 아이가 3세때에 기침이 심하고 가래가 끓고 열도 높이 오르고 숨이 차서 폐의 X-선 촬영을 하였더니 양측 폐야에 혼탁된 음영이 나타났다. 척 보아 급성 폐염이었다. 소아과 전문의사를 청해서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나타나지를 않았다. 나는 그 때에 교회의 장로 방계성 목사님을 청해서 기도해달라고 했다. 방장로님은 병이 나아지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되기를 간구했다. 그 아이의 생명을 주님에게 온전히 부탁드리는 기도이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가셨다. 그 후 몇 시간이 안되어 아이는 숨차던 것이 나이지기 시작하고 열이 떨어지면서 땀이 나며 조금씩 나아져서 몇 일 안에 완치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자연 치유기전에 의해서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으나 믿음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아이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장하심을 믿는 믿음이 더 확실하게 자랐던 것이다. 나는 계속 기도하기를 소아과 의사에게 지혜를 주셔서 올바른 지도를 하게 해 달라고 하였고 또 소아과 선생의 지시를 따랐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의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는지? 그리스도께서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믿고 그의 영광이 나타나기 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한 것은 주의 사랑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랑은 옳은 방법을 찾아 낸다. 이것이 의학 발전의 철학이다.
3. 믿음의 기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 라고 했다. 믿음의 기도라고 한 것은 주께서 저를 일으키 실 줄로 믿고 하는 기도이다. 주님은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속죄하여 주셨다. 병자를 일으키시고 죄인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믿는 자를 통하여 일하시고 계신다. 병자를 일으키시려고 기도하도록 하신 것이다. 병자가 병이 나아서 일어나는 것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이 일으키실 때에는 육의 건강과 아울러 구속된 인간으로 일어나게 된다. 병의 원인은 여러가지이어서 반드시 다 죄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할 지라도 진리에 순응치 못한 결과로 되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병자가 병이 완쾌되어 건강을 회복하는 일도 귀하지마는, 병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떠났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영접하는) 일은 더 근본적인 은혜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건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하는 인격에 육의 건강이 필요하다. 육이 건강하고 영혼이 마귀에게 이끌릴 때, 쇠고랑이라도 제어 못할 정신병자와 같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또 흔히는 몸이 건강하게 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하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건강하게 되어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 먼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 영생한다. 믿음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의 뜻대로 대화하는 것이어서 병자를 예수에게로 인도하며, 예수님의 긍휼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병자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바쳐드리고 그와 연합하여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병자는 주님이 일으켜 주시는 능력으로 구원된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어 속죄의 은혜의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까닭이다.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안에서 살게 되므로 죄의 기억도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병과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의 병과 죄가 나의 것과 같이 느껴지고, 그의 생명을 사랑하게 되므로 서로 서로 죄를 고하고 용서함을 받아 완전한 인격자로 된다. 철저한 회개는 하나님 앞에 하는 일이어서 다시는 같은 죄를 범치 않는데 있는 것이다. 사람의 기도로 죄가 속해 진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도로 병자의 마음이 감동하게 되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죄를 사하시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에만 있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이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또 믿는 자들의 말과 행실, 또는 기도로 예수님을 증거케하여 믿게 하신다.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에 접하게 될 때 자기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바쳐 드리게 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4. 의인의 기도
의인의 기도는 곧 믿음의 기도이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행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다만 예수를 구주로 믿어 예수님의 의를 얻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옛날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으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 즉 자연계가 순종했다. 의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연계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한 것처럼,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의 기도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게 되므로 자연계가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연계의 이상은 이상 세계 곧 하늘 나라에서 사람에게 순응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소원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자연과 사람은 서로 순응하여 대조화(perfect harmony)를 이루게 된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겨자씨 알 만한 것이 있으면, 이 산더로 명하여 저 바다에 옮기어지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루어 지는 것은 그 명하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하나님의 뜻에 의한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기사가 있는데, 이것이 자연현상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말이다. 원래 자연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지어졌고, 자연현상도 사람의 뜻에 순종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창조의 원리이었다. 그런데 사람 (아담과 하와로 대표된)이 진리(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자연계와 사람과의 부조화(disharmony)가 생겼다. 즉 사람이 이기적으로 되고,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렸으므로 자연계의 불순종이 나타났다.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인 의인은 예수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며 기도하는 고로 그것이 곧 이루어 지며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기도의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열왕기 상 17장과 18장의 기사는 이 기도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을 믿은 엘리야는 자기의 의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였으므로 그의 기도와 말은 예언으로 되었고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사벨의 회개를 바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한 것이 곧 예언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했기 때문에 자연계가 순종했다.

 
그러나 아합과 이사벨은 종래 회개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시는 자유의사를 가지고 믿지 않는 것이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는 자들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 (7:16, 11:14, 14:11). 곧 이것은 음행과 우상숭배를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다. 아합은 엘리야가 보여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이사벨이 가지고 들여온 바알 신을 섬기며,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다. 그러하다가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아람왕을 치려고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싸우다가 아람 왕의 군인의 화살을 맞아 죽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여화와 하나님을 증거하고 자기의 사명을 다 하였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도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주가 되심을 증거하는 생활을 하며 기도하자. 내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고 내 나라와 온 세계에 평화가 임할 것이다. 나는 벌써 세계의 평화는 받은 줄 믿고 기도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성취하실 것이니까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한다

기독교 이상주의 장기려 1969년 부산모임 11호

기독교 이상주의  장기려 1969년 부산모임 11호
만일 누가 나에게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독교 이상주의로 살고 싶다고 대답하리라.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고 사회는 진실과 사랑이 없으며 인생은 무엇을 목적하고 사는지? 혼돈상태와 같이 보인다.
현대의 지식과 교양이 풍부한 사람들은 인간적 이상주의를 고조하며, 대다수의 서적은 인간적 이상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이상주의를 강조하면서 사는 이는 적다.
인간적 이상주의란 인간의 지식과 덕성을 발전시키어 이상에 도달하겠다는 것인데, 이 논리는 이상의 실재와 실현성이 극히 박약하며, 결국 이상은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기독교 이상주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심과 또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하늘나라를 이루어 주심을 믿는 삶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믿고 승리생활을 하였다.
1. 믿음과 이상
야나이하라 선생은 이상과 믿음에 관한 정의를 다음의 세가지로 말하였다.
1) 이상이란 하나님에게 있어서 벌써 실현된 뜻이 땅에서는 그 실현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벌써 성립된 경륜이며 땅에서는 그 성취가 진행중의 것이다.
2) 이상은 사물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상 저편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과 유리된 허공적 환상이 아니고 도리어 현상의 기초가 되어 있고 현상 가운데 상징화된 본질이다.
3) 이상은 역사의 장래이다. 따라서 현재 저편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와 관계없는 공상이 아니고 차라리 현재의 밑을 흐르고 있고, 현재를 역사의 종국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위에 정의한 이상을 인식하고 파악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곧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역사의 종국을 현재로 하고, 사물의 본질을 현실로 하며, 하늘나라와 그 국민 (하나님 자녀)으로의을 지향하여 살게하는 능력이다.
사람이 장래에 대하여 가지는 소망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는 벌써 실현되어 있다. 즉 인류의 영화, 사회의 완성, 개인의 구원,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어 실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소망으로 비친 것이다.

우리는 현상계에 있어서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한다고 하나, 그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현실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실재하는 그 을 뚫어보고 이해하는데 있다. 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감각기로서는 알 수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 인간 및 우주의 본질이 감각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 자각이 벌써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 가를 알고자 할 뿐 아니라, 왜 존재하는가를 이해하여 그 참된 뜻을 표현하려고 소망한다. 즉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가 되는 사죄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를 이룬다고 하는 사실성 (이상)은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으리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취되어 현실로 실재하는 까닭에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것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또는 감정적으로 환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까닭에 사람의 자각에 비친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2. 이상과 현실
우리는 현실을 존중한다. 왜냐하면 예민한 현실의 감각이 ………(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그리고 맹종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의하여 현실을 보는 사람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현실 중에서 진실을 보는 힘은 학문이다. 학문은 현실 중에서 법칙적인 것을 식별하고, 그 참된 뜻과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 학문의 권위가 있다. 따라서 학문은 정치, 실업, 경제 기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당면의 실제적인 정책에 대하여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게 된다. 학문은 현실정책을 비판하고 지도함으로 그 현실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법칙적으로 파악하고도 이것을 발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학문의 지도적 임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는 권력과 이익에 꼬리를 흔들며 영합하는 방관적 학자, 또는 시국을 이용하여 동료학자에 대한 사원을 품는 것과 같은 식모적인 학자, 또는 탐욕적인 정책에 대하여 근심하고 개탄하는 학자는 있어도, 정책을 비판하고 바르게 지도하는 학자는 드물다.
현실의 법칙적 파악은 학문이지마는 법칙의 인격적 파악이 아니라면 신 ……. (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하는 것이다. 이 법칙의 인격적 파악은 믿음의 힘이다. 현실에 대하여 학문의 권위가 있는 것처럼 학문에 대하여 신앙의 권위가 있다. 신앙의 권위는 인격의 권위이며 의사(意思)의 권위이다. 또한 실행의 권위인 것이다. 옛날부터 예언자는 현실에서 사건을 이상에 비치어 사물의 진상을 궁구하고 시국의 동향을 잘 살펴서 경고의 소래를 발한다. 저들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세상은 저들을 버리고 죽였다. 그러나 역사가 지나 간 뒤에 진실을 살펴보는 때가 오면 신앙에 의하여 산 사람은 영예를 얻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사람은 믿음으로 확증되나니라라고 하였다 (히 11;2).

3. 세계관과 신앙
사람은 우주 창조를 보지 못했다. 우주의 창조는 사람보다 먼저 있었고, 하나님은 우주 창조보다 앞서 계신다.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바이다. 우주의 삼라 만상은 무엇에 기초하여 있는가? 하나님의 실재가 사물 존재의 기초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 계시려고 하여 계시는 이시다. 즉 실재의 근원이시며 실재 자체이시다. 이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하여 비로서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 우주와 자연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뜻에 터 닦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어서 그 목적은 사람에게 생활의 환경을 주는데 있다. 자연에는 인격이나 의사가 없는 것이지마는 바울은 마치 자연에 영이 있는 것처럼 의인화 (擬人化)하여 말하기를 지금까지 만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과 자연환경과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구원 없이 자연의 영화도 없고 자연의 영화 없이는 하늘나라의 완성도 없다. 사람이 이 이상을 아는 것은 믿음에 의한다.
4. 인생관과 신앙

 
이상 세계인 하늘나라의 주체는 하나님과 .서(원문이 흐려 내용을 알 수 없음) 자연은 환경이며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인격적 존재자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상징(象徵)으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히 되는 일이 인간 개인의 이상이며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늘나라를 실현하는 일이 인간사회의 이상이다. 이러한 인생의 의의와 목적을 깨닫는 능력은 신앙이다. 또한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생활 태도를 취하게 하는 힘도 신앙이다. 옛 사람들 중에서 맨 처음에 아벨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 형 가인보다 나은 드렸던 것이다. 그의 생활 태도가 현실에서 이상을 향한 것이 아니고 이상에서 현실을 보고 산 까닭이다. 그의 인관이 자기의 뜻대로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산 까닭이다. 아벨이 드린 희생은 왜 의롭다고 하여 영원한 예물이 되었던가? 믿음으로 드린 까이다. 그가 드린 것은 현실을 쌓아 올려 이상에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인 까닭이다. 즉 율법의 의가 아니고 믿음의 의인 까닭이다. 그는 믿음에 의하여 일생을 드린 까닭이다. 그는 죽었으나, 오히려 지금도 말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의하여 현실을 격려하고 있다. 그의 영의 힘은 지금도 현실로 나타나, 이상으로 산 생명의 영원적 현재를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부활의 이상에 기초하여 살며, 또한 부활의 완성을 예표하는 사실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일정시대에 있어서 주기철 목사와 공산군이 왔을 때에 있어서 손양원 목사와 같은 이들은 [옛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바라는 것을 확신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진실로 하는] 믿음에 의하여 증거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믿음의 제물로써 하나님에게 드렸다. 이들은 현실에 의하여 이상을 삭감하려는 타협적 태도를 버리고, 이상에서 현실을 내려다보고 현실을 비판하고 규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들이 [진실한 믿음]을 강조한 것은 곧 이상에서 사는 그들의 생활태도이었다. 이들이 믿음으로 이상에서 산 까닭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지금에 현실, 현실이라고 물거품처럼 터트리다가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구멍으로 기어들가는 게와 같은 인간들이 횡행하는 중에 있어서, 우리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하늘 높은 이상의 소리이다. 영원히 살아 말하는 지도정신이다. 이상과 신앙, 지도정신의 결핍, 이것이 현대 우리나라와 세계의 근본적인 결함이 아닌가. 온 세계인류는 이러한 이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믿음의 삶은 곧 하나님 자녀로서 하늘나라를 이루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장기려 선생님 글, 1972년 8월 부산 모임

역사를 담당하는 사람       장기려   1972년 8월 부산모임
히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일은 우리가 진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진리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위대한 훌륭한 선생을 떠나 보낸 뒤에 남은 제자들에게 불안감과 무력감이 감도는 것은 그 선생의 위대한 영향력에만 도취하고 그 선생을 지도했던 진리에 눈 뜨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영웅주의로서 선생을 쫓지 말라. 영웅은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그리고 그 증언을 하는 이름없는 전사가 있으면 된다. 그리스도는 행복되도다 너희 힘있는 위인이여라고 하시지 않고, 행복되도다 너희 가난한 자여 라고 말씀하신다. 지가의 무력을 느끼고 머리를 수그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행복되다고 하신다. 이것이 참 진리이다. 이 진리가운데 약한 우리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신뢰하기만 하면 후에는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신다. 이 신뢰가 (믿음이) 비로서 큰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힘의 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다음 시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들은 다소나마 나의 힘으로 그것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참으로 역사를 올바르게 지도하고 새 시대를 건설하 힘을 가지고 계신이는 하나님뿐이어서, 이 하나님에게 각 사람이 각각 그 직장에서 믿고 따르는 것이 중대한 과제이다. 이와 같이 작은 사람들의 힘을 하나님은 하나로 만들어 큰 힘으로 해 주신다. 다음시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할 유일 최대의 사은 이 하나님의 충실한 한 병졸이 되는데 있다. 만일 이것을 산산이 헤져진 무통제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은 하나님의 지배와 경륜을 참으로 믿지 않는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나의 마음에 큰 평안을 준다. 또 내가 무인가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주제넘은 각을 깨 서준다. 그리고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견디고 남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을 사랑해 가는 낮은 마음을 주신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고 하면 우리의 생각을 넘치는 새로운 움이 거기에서 돋아 나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이 겸손한 의뢰심을 잊은 역사의식이 다시 일본의 장래를 파기하게 되리라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벌써 그 징조는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자기의 주도권으로 역사를 형성하려고 하는 때에 파괴로 떨어져 들갈 함정이 언제나 열려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진리를 반역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지배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이데, 우리 시조는 이 시험에 졌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면 마음에서 진실을 원하고 또 그렇게 꾸미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억압하고 파화는 길을 준비하게 되는 사태가 나타나게 된다. 인류 역사는 바로 이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현재에도 같은 일이 어디서나 진행되고 있다. 그 진상을 통찰하고 이것에 대처하는 일이 우리들의 과제이다. 끝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은 요한복음 21:18-19 말씀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우리들의 생에는 베드로와 같이 원치 않는 대로 인도되어도 믿고 따르는 일 이것이 역사를 담당한 자로서 합당한 일인 것을 확신하고 강조하는 바이다.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창세기 1-3장

아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나무, 예수님                                         
창조 (The Beginning, The Word, The Image of God on Earth)
1.태초에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없는 앞에서 침묵하는 , 하나님의 형언할 없는 말씀에 집중하는 ;
말씀 (the words) -  , 1:1-4, 말씀으로 창조하심.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고 계심 (사랑하는 마음),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Then God said, “Let us make humankind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지면의 맺는 모든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복을 주심세상을 다스림 (28), 먹을 거리를 주심 (29, 30).
심히 좋았더라. God saw all that he had made – and it was very good! (The Hebrew text again uses הִנֵּה (hinneh) for the sake of vividness. It is a particle that goes with the gesture of pointing, calling attention to something)
27. God created humankind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them.
하나님의 형상대로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창세기 2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soil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spirit, from Amplified bible)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from NET Notes, The Hebrew word נְשָׁמָה (nÿshamah, “breath”) is used for God and for the life imparted to humans, not animals (see T. C. Mitchell, “The Old Testament Usage of Nÿshama,” VT 11 [1961]: 177-87). Its usage in the Bible conveys more than a breathing living organism (נֶפֶשׁ חַיַּה, nefesh khayyah). Whatever is given this breath of life becomes animated with the life from God, has spiritual understanding (Job 32:8). sn Human life is described here as consisting of a body (made from soil from the ground) and breath (given by God). Both animals and humans are called “a living being” (נֶפֶשׁ חַיַּה) but humankind became that in a different and more significant way.)
하나님의 형상대로하나님의 성령(생명의 ) 불어 넣으심, living being . 창조된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고 생명이 되심. Man does not live without God’s spirit, live as body in Spirit. 인간의 몸은, 지상 위의 하나님의 영의 실존 형태, Existence-form of God’s spirit (from “Creation and Fall, Two Biblical studies” by Dietrich Bonhoeffer).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The Lord God planted an orchard in the east, in Eden and there he placed the man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The Lord God made all kinds of trees grow from the soil, every tree that was pleasing to look at and good for food. (Now the tree of life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were in the middle of the orchard).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6 Then the Lord God commanded the man, “You may freely eat fruit from every tree of the orchard, 2:17 but you must not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or when you eat from it you will surely die.”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한계, 없는 인간, 죄를 모르는 인간이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 생물을 부르는 것이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5.아담과 그의 아내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18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2:23 Then the man said, “This one at last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is one will be called ‘woman,’ for she was taken out of man.” 2:25 The man and his wife were both naked, but they were not ashamed.
동물들의 이름을 지음, 여자를 만드심, 이는 (at last), my flesh, my bone,
nakedness, no shame – 무죄함, 죄를 알지 못함, 온전함, either innocence or integrity, no fear of exploitation, no sense of vulnerability (from NET notes), believe in grace (은총에 대한 믿음), no division. essence of (primeval) unity & unbrokeness (from Creation and Fall).
타락 (The Fall)
3: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6.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1 Now the serpent was more shrewd than any of the wild animals that the Lord God had made. He said to the woman, “Is it really true that God said, ‘You must not eat from any tree of the orchard’?” 3:2 The woman said 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from the trees of the orchard; 3:3 but concerning the fruit of the tree that is in the middle of the orchard God said, ‘You must not eat from it, and you must not touch it, or else you will die.’” 3:4 The serpent said to the woman, “Surely you will not die, 3:5 for God knows that when you eat from it your eyes will open and you will be like God, who know good and evil.” 3:6 When the woman saw that the tree produced fruit that was good for food, was attractive to the eye, and was desirable for making one wise, she took some of its fruit and ate it. She also gave some of it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and he ate it. 3:7 Then the eyes of both of them opened, and they knew they were naked; so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coverings for themselves. 3:8 Then the man and his wife heard the sound of the Lord God moving about in the orchard at the breezy time of the day, and they hid from the Lord God among the trees of the orchard
- “” - 사탄, 창조물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모호한 의문의 눈길을 제시,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 듯하나, 실은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린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사람은 (good)가운데 살면서 (evil) 모른 살았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한계를 두신 것은 악을 알지 못하게 하시는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한계 없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심.
-“하나님과 같이 (like God, Sicut Deus)”: 하나님의 영의 함께 하심을 거부하는 행위, 하나님처럼 사람, 피조성 (in God’s image, in God’s spirit) 상실한 사람, 한계를 상실한 사람, 선뿐만 아니라 (evil) 아는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인 사람.
-she ate, gave to the man, he ate: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disobedience)=하나님처럼 , 주저함을 없음, evil(sin) desire to have man (4:7), 번져감. 아담과 여자는 하나로
아담이 먹고 나서 함께 타락함.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made covering for themselves; It does not say that they knew good and evil. Division of primaeval unity, refusal to recognize any limit, boundless passion without a limit (like as sexuality), hating, do not accept the limit, cover from the other people, feel shame.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범한 결과 하나님 앞에 없다. 하나님 같은 존재가 , 한계를 인정치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며 숨어야 했다. 인간의 이러한 도망침이 인간의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의 기준이며, 우리를 고발한다. 양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도망해 스스로를 심판하며, 그의 선과 악으로 살아간다. 양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방어이나 우리의 의지나 앎에 반해 하나님의 음성을 향한다.
-This flight, Adam’s hiding from God, we call conscience. It is the function of the conscience to put man to flight from God. Conscience drives man from God into a secure hiding place. Conscience is not the voice of God to sinful man; it is man’s defense against it, but as this defense, it points toward it, contrary to our will and knowledge (from Creation and Fall).
도망 (Flight)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9 But the Lord God called to the man and said to him, “Where are you?” 3:10 The man replied, “I heard you moving about in the orchard,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so I hid.” 3:11 And the Lord God said, “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 Did you eat from the tree that I commanded you not to eat from?” 3:12 The man said, “The woman whom you gave me, she gave me some is this you have done?” And the woman replied, “The serpent tricked me, and I ate.”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은 도망치는 인간을 멈추게 하신다. 숨은 곳에서 나오도록, 그의 덮개로부터 나오도록, 하나님 앞에 서도록 부르신다. 양심은 말한다. 아담, 너는 벌거벗었다. 숨어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양심을 죽이시며, 아담은 하나님으로 도망할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담은 죄를 고백하면서도 계속 도망친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 회개함을 없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지 못하고 사탄에게 배운 기술을 사용한다. 부르심 가운데 있는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고 거부한다. 도망치며 타락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주와 약속 (Curse and Promise)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 하시고 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4 The Lord God said to the serpent, “Because you have done this, cursed are you above all the wild beasts and all the living creatures of the field! On your belly you will crawl and dust you will eat all the days of your life. 3:15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offspring and her offspring; her offspring will bruise (crush) your head, and you will attack her offspring’s heel.” 3:16 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increase your labor pains; with pain you will give birth to children. You will want to control your husband, but he will dominate you.” 3:17 But to Adam he said, “Because you obeyed your wife and ate from the tree about which I commanded you, ‘You must not eat from it,’ cursed is the ground thanks to you; in painful toil you will eat of it all the days of your life. 3:18 It will produce thorns and thistles for you, but you will eat the grain of the field. 3:19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for out of it you were taken;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will return.”
- 뱀과의 원수 , enmity toward serpent; 교만했던 뱀은 낮아져 땅을 기며 먼지를 먹는다. 사람과 사탄의 원수 . crush the head of serpent; 사탄의 최종적인 죽음,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실 승리를 약속하심.
- painful community of man and woman; passionate desire (nostalgia) toward the primaeval unity (본래의 하나됨을 향한 병적인 욕망, sexual desire), painful childbirth, conflict between man and woman, 남자를 control하기 원하나 오히려 남자의 지배를 받음.
- division between man and nature; disunion, 즐거움 (in Eden) 가운데 먹음 -> eat in the painful toil.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가시덤불과 엉겅퀴, labor, 흘림, but 먹을 것을 약속하심.
- death 죽음;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한 사람에게 죽음을 약속하심, death – live before God without life from God, 하나님처럼 상태죽음, 사람의 죽음하나님처럼 상태 (sicut deus)에서 벗어남, death of turning into dust as the death of his present state of death (his sicut deus being). In this promise of death, we need the end of death,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죽음의 약속 가운데, 하나님처럼 됨의 , 죽은자의 부할의 약속이 선포되어야 한다).
생명나무 (The Tree of Life)
3: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 3:20 The man named his wif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the living. 3:21 The Lord God made garments from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3:22 And the Lord God said, “Now that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he must not be allowed to stret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from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3:23 So the Lord God expelled him from the orchard in Eden to cultivate the ground from which he had been taken. 3:24 When he drove the man out, he placed on the eastern side of the orchard in Eden angelic sentries who used the flame of a whirling sword to guard the way to the tree of life. 4:1 Now the man had marital relations with his wife Eve,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Cain. Then she said, “I have created a man just as the Lord did!”
- Eve (life, life-giver); 이름의 의미. Eve, the fallen, wise mother of man – this is the first beginning. Mary, the innocent, unknowing mother of God – this is the second beginning (from “Creation and Fall”).
- made garments and clothed; cover their nakedness by substantial covering, alienation (소외), preservation, restrain
- tree of life;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어버림. Sicut deus means death that consist in having to live before God without life from God, live without life from God (The will to live, the inability to live, having to live) - living death of the man who is like god. 아담과 이브에게는 가지 욕망이 있음; 하나님처럼 , 영원한 생명 want to be sicut deus, want to reach out for the tree of life. 하나님께서 생명을 잃어버린 sicut deus에게 끝을 주심 (death of death), 에덴 동산을 떠나게 하심. 생명나무를 보호하심.
- 가인; new life but murderer, 한계를 상실한 인간, 가인 이래의 살인의 이야기들...
- 사람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처럼 인간을 구하심), 십자가의 예수님, 살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가인 이야기의 , 낙원의 입구에서의 마지막 처절한 폭풍, 십자가 아래에서 사람은 죽고 예수께서 살아나신다. 십자가가 생명의 나무가 된다. 저주받은 땅의 한가운데 새로운 생명나무가 되신다.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생명 샘이 되시며, 생명을 갈급하는 이들을 부르시며 부르신 이들을 충만케 하신다. 놀라운 낙원, 바로 골고다 언덕, 십자가, 주의 보혈, 주의 . 놀라운 생명나무, 나무에서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시고 죽으셔야 했다. 바로 생명의 왕국, 은혜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할, 소멸될 없는 소망 (imperishable hope), 생명나무, 십자가의 예수님, 낙원 이야기의 완성.
He unlocks again the door
Of paradise today:
The angel guard the gate no more
To God our thank we pay

참고
1.       개역개정 창세기 1 – 4 1
2.       New English Translation Bible (NET bible) 1 – 4 1
3.       Creation and Fall, Two Biblical Studies, Dietrich Bonhoeffer

4.       창조와 타락, 창세기 1-3장에 대한 신학적 해석,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